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미니멀 아트의 핵심 아티스트이자, 선과 면, 간격과 구조만으로 공간의 본질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의 작업은 조각을 넘어 건축·가구·공간으로 확장되며, 미니멀리즘이 ‘형태’가 아니라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술가에서 공간 실험가로, 저드의 미니멀리즘이 태어난 배경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처음부터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그는 화가·비평가·조각가로 활동하며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런데 회화의 평면만으로는 공간의 깊이와 구조를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국 캔버스에서 벗어나 ‘삼차원 오브제’로 이동했으며 이때부터 미니멀 아트의 핵심 언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붓질이나 서사를 제거하고, 오직 형태·재료·비례·간격 같은 기본 요소만으로 작업을 구성했다. 저드에게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제거한 뒤에도 남는 순수한 관계의 구조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장식적이거나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형태가 공간에 놓였을 때 어떤 긴장과 균형을 만들고, 빛과 여백이 그 사이에서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 미술의 범주를 넘어, 미니멀리즘이 시각예술에서 건축·공간·가구로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선·면·공간의 ‘관계’를 만든 조각, 단순함이 깊어지는 이유
저드의 조각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다. 반복된 사각형 상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평판, 동일한 비례로 구성된 알루미늄 구조물. 하지만 이 단순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작품이 깊어 보이는 이유는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 형태가 만들어내는 관계'때문이다. 저드는 “작품은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It should be what it is)”고 말하며, 감정적 해석이나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했다. 대신 소재의 물성, 간격의 계산, 빛이 닿는 면의 각도를 통해 작품이 공간 속에서 어떤 구조적 긴장을 만들어내는지 탐구했다. 예를 들어 금속 표면에 빛이 스치며 생기는 얇은 그림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 상자들이 만들어내는 리듬, 재료의 차가움과 여백의 고요함이 만나 만들어지는 균형감. 이 모든 요소는 저드의 방식 안에서 하나의 조형 언어가 된다. 미니멀리즘이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복잡한 ‘관계의 재배치’라는 사실을 그의 작품은 정확하게 말해준다.
마르파(Marfa), 미니멀리즘이 공간이 된 장소
저드의 미니멀리즘이 단순히 조각을 넘어 ‘공간’으로 확장된 가장 중요한 사례가 텍사스의 '마르파(Marfa)'다. 그는 이 외딴 사막 도시의 옛 군부대를 매입해 스튜디오, 작업실, 대규모 설치작품, 그리고 생활공간까지 하나의 환경으로 설계했다. 마르파는 저드의 예술이 건축·조경·빛·여백과 얽혀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장소다. 동일한 크기의 금속 상자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 사막의 수평선과 작품의 직선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하루의 빛이 이동하며 작품의 표정을 끊임없이 바꾸는 장면은 그의 철학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보여준다. 마르파는 작품이 놓인 공간이 아니라, 저드의 미니멀리즘이 ‘환경 전체’로 구현된 실험실에 가깝다. 여기서 그는 작품과 공간을 가르는 경계를 없앴고, 미니멀리즘을 단순한 조각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구조로 확장했다.
가구 디자인에 담긴 저드의 태도, 미니멀리즘은 ‘선택’이다
미술가였던 저드는 가구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의자, 선반, 테이블은 장식이 없고 직선만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단순함을 위한 단순함이 아니다. '기능을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기 위한 선택의 결과'다. 그는 소재의 결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으며, 구조를 가리지 않고 노출했다. 그래서 저드의 가구는 한눈에 보면 단순한 나무나 금속 덩어리 같지만, 실제로는 세밀한 비례와 간격의 계산이 들어간 구조적 오브제다. 이러한 디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지고, 공간을 정리하는 힘을 갖는다. 요즘 미니멀 인테리어에서 저드의 선반·책상·벤치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가구를 예술처럼 만들지도 않았고, 예술을 가구처럼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두 영역을 관계, 구조, 비례라는 같은 원리로 바라본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형태를 줄이는 작업이 아니라, 본질만 남기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저드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미니멀리즘은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세우는 일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남긴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형식의 미학이 아니다. 형태와 공간이 맺는 관계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업은 과장되지 않지만 깊고, 조용하지만 강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정교하다. 미니멀리즘은 덜어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겨진 것들이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과 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미니멀리즘은 결국 무엇을 비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선택하는 태도다. 저드는 그 선택을 가장 치열하게 밀어붙인 아티스트였고, 그의 작업은 지금도 미니멀 공간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