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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그레이가 보여준 미니멀리즘의 얼굴, 조용하게 비워낸 모더니즘

story4574 2025. 11. 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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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그레이는 화려한 장식을 거부하고, 생활 동선과 빛을 따라 공간을 설계한 디자이너였다. 라커 가구와 E-1027 테이블, 해안가 주택 E-1027을 통해 그녀가 보여준 ‘조용한 미니멀리즘’을 따라가 본다.

 

‘최소한의 선’으로 완성한 가구, 아일린 그레이의 E-1027 테이블
‘최소한의 선’으로 완성한 아일린 그레이의 E-1027 테이블

흰 여백 사이에서 다시 만난 디자이너

미니멀리즘을 떠올리면 보통 북유럽 가구, 일본식 여백, 바우하우스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요즘 디자이너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다 보니, 자꾸 마음에 남는 이름이 있다. 조금은 조용하고, 조금은 뒤늦게 발견된 사람.
바로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다. 그레이의 가구와 집을 보고 있으면 ‘멋진 모던 디자인’이라는 감탄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얼마나 조용한 삶을 꿈꿨을까?." 장식을 벗겨내고, 삶에 꼭 필요한 구조만 남기고, 그 위에 빛과 바람이 드나들 여백을 조금 더 열어둔 사람. 오늘은 아일린 그레이를 미니멀리스트의 시선으로, 내가 요즘 좋아하는 그 눈으로 다시 꺼내본다.

장식의 시대에 태어난, 감각적으로 미니멀한 사람

그레이가 디자인을 시작하던 시기의 유럽 실내는 장식으로 꽉 차 있었다. 두꺼운 벽지, 복잡한 패턴, 금빛 장식과 곡선이 넘치는 공간. ‘풍요’와 ‘취향’을 증명하려면 뭔가를 더 붙이는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그레이는 라커 스크린과 가구를 만들기 시작한다. 라커라는 재료만 들으면 화려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녀가 만든 결과물들은 어딘가 방향이 다르다. 이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화려한 패턴 대신 큰 면의 색과 단순한 형태다. 두 번째는 장식적인 곡선 대신 단정한 직사각형, 원형이다. 세 번째는 바로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 아닌 쓰임을 전제로 한 구조다. 장식적인 재료를 쓰면서도 결과는 언제나 조금 더 단순하고, 조금 더 정리된 쪽으로 기울어 있다. 시대와는 살짝 어긋난 이 감각이 나에게는 이미 미니멀리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최소한의 선’으로 완성한 가구, E-1027 테이블

그레이의 미니멀한 감각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가구는 역시 E-1027 사이드 테이블이다. 둥근 유리 상판, 가느다란 튜브 스틸 프레임. 딱 한 번만 봐도 머릿속에 남는 단순한 실루엣인데, 자세히 보면 “예쁘게 간소화했다”를 넘어서 있다. 먼저 침대 옆에 두면 물 한 잔, 책 한 권 올려두기 좋은 높이가 돋보인다. 그리고 투명한 상판 덕분에 시야를 막지 않는 시각적 가벼움도 감각적이다. 필요할 때는 가까이 끌어오고, 아닐 땐 살짝 밀어둘 수 있는 부담 없는 무게 역시 미니멀리즘의 실용을 강조한다. 이 테이블은 결국 생활 동선에 맞춰 다듬어진 최소한의 구조다. 그레이는 “이걸 어디에 둘까?”보다 “어떤 몸짓이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올까?”를 먼저 떠올렸던 디자이너 같다. 그래서 그녀의 가구는 눈에 띄게 튀지는 않는데, 집 안에 들여놓으면 이상하게 제일 자주 손이 간다. 적지만 충분한 것, 미니멀리즘이 이야기하는 조건을 조용하게 충족하는 가구다.

바다를 향한 집, E-1027 삶을 위한 미니멀 하우스

그레이의 미니멀리즘이 가장 크게 펼쳐지는 무대는 해안가 주택 E-1027이다.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
새하얀 박스형 볼륨과 얇은 난간, 수평으로 길게 열린 창이 나란히 놓인 집은 첫눈에 봐도 모던하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집은 확실히 삶을 위한 미니멀 하우스에 가깝다.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멋지다’보다 “저기서 며칠 조용히 숨어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이 집은 생활 동선에서 출발한 평면이 특징이다. 침대, 테이블, 수납장, 책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듯 배치되고 자주 쓰는 물건은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고 닿는 위치에 놓인다. 그리고 “어디에 둘까”가 아니라 “어디에 두면 덜 움직이게 될까”를 고민한 집 같다. 다음은 빛과 바람을 위한 여백이다. 남프랑스의 강한 햇빛을 그대로 들이지 않고 창의 크기와 방향, 가느다란 차양으로 부드럽게 걸러낸다. 실내의 가구 역시 덩어리를 줄이고 바닥과 벽 사이를 비워 빛이 머무를 자리, 바람이 흐를 길을 만들어 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실내와 바다 사이의 완만한 거리다. 문을 열면 바로 이어지는 테라스, 그 앞의 수평선. 풍경을 구경하기 위한 집이라기보다 풍경 속에 슬며시 섞이기 위한 집에 더 가깝다. E-1027은 화려한 휴양용 별장이라기보다, 혼자 머무르며 숨을 고르기 위한 작은 은신처 같다. 눈에 보이는 장식을 줄이는 대신, 몸과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한 집. 그게 그레이식 미니멀리즘처럼 느껴진다.

보여주기 위한 미니멀 말고, 내가 편한 미니멀

요즘 미니멀 인테리어 이미지를 보면, 비슷한 화이트 톤, 비슷한 수납장, 비슷한 구성이 계속 떠돈다. 정답이 하나 있는 것처럼 소비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레이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만든 미니멀리즘은 조금 다르다. 언제나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정리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바다와 빛, 고요한 방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설계하고,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공간은 “유행하는 미니멀 인테리어”라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최소한을 천천히 찾아낸 결과처럼 보인다.

이 지점이 지금 미니멀 라이프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꽤 크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속 집을 그대로 복사하듯 따라 하기보다, 내 하루의 동선, 내가 원하는 조용함의 농도를 먼저 살펴보는 것. 아일린 그레이는 말 없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미니멀함의 기준은 결국 남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오늘 우리의 미니멀 라이프에 남는 문장들

아일린 그레이를 미니멀리즘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면, 몇 문장이 조용히 남는다. '장식을 줄이는 것보다, 삶에 필요 없는 동작을 줄이는 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니멀이 아니라, 내가 숨 쉬기 편한 미니멀'. '물건의 개수보다, 여백에서 느껴지는 내 마음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바다를 향해 지은 작은 집, 손을 뻗으면 닿는 높이에 놓인 테이블, 시야를 가리지 않는 가구들. 그레이의 디자인은 크게 소리치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 보고 있으면 이런 질문이 스며든다. 지금 내 곁에 남겨두고 싶은 ‘최소한’은 뭘까. 모던 디자인의 거장들 사이에서 뒤늦게야 다시 불린 이름.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지금 우리의 미니멀 라이프를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나답게 정리해 보게 만든다. 요즘 내 머릿속 미니멀리즘도, 어쩌면 그레이가 만든 집처럼 조금씩 더 고요하고 개인적인 쪽으로 옮겨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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