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모리슨의 디자인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개념이 바로 '슈퍼 노멀(Super Normal)’이다. 이 디자인 철학은 미니멀리즘의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다. 일상의 기능, 조용한 형태, 오래 쓰는 디자인 중심으로 그의 세계를 살펴본다.

화려함보다 ‘기능의 평온함’을 선택한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 1959~ )은 영국을 대표하는 산업 디자이너로, 가구·생활도구·가전까지 넓은 영역에서 오래 활동해 왔다. 그의 디자인은 첫눈에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게 디자인 아이콘이 맞아?” 싶을 만큼 조용하고 단정하다. 하지만 이 ‘조용함’ 속에 모리슨의 의도가 분명히 담겨 있다. 그는 디자인이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디자인이 앞에 나서기보다 일상 뒤쪽에서 조용히 기능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 태도는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기능이 흐트러지지 않게 지켜내는 미니멀리즘의 핵심과 겹친다.
슈퍼 노멀(Super Normal),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미니멀 구조
재스퍼 모리슨이 추구한 '슈퍼 노멀(Super Normal)’은 말 그대로 ‘보통처럼 보이지만, 보통 이상으로 잘 작동하는 물건’을 뜻한다. 겉으로는 특별한 장식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지만, 매일 사용할 때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손이 가는 물건들. 모리슨은 이런 물건을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슈퍼 노멀 디자인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과장되지 않고, 감정적으로 요란하지 않으며,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 조용한 균형을 갖춘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컵, 의자, 스툴 같은 사소한 물건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평범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편한’ 구조로 정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통 미니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를 삭제하고 시각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모리슨의 방식은 정반대다. 그는 단순한 형태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대신 실제 사용 과정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차근차근 걷어내고 마지막에는 결국 자연스럽게 미니멀한 형태만 남는다. 즉, 단순함은 ‘결과’ 일뿐 ‘목표’가 아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단순함이 모리슨의 디자인을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고 어떤 공간에도 튀지 않으면서 조용한 균형을 만들어주는 이유다.
모리슨의 가구가 미니멀 인테리어에서 사랑받는 이유
미니멀 인테리어에서 모리슨의 가구가 꾸준히 선택되는 이유는 단순한 ‘심플함’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조용한 형태다. 그의 의자나 테이블은 선이 얇고 구조가 단정하다. 공간을 ‘장식’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인테리어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둘째는 기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구성이다. 미니멀 디자인은 기능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리슨은 기능이 흐트러지지 않는 선에서만 최소화를 시도한다. 그래서 가구를 실제로 사용할 때의 안정감이 뛰어나다. 셋째는 시간이 지나도 과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행하는 패턴이나 장식을 쓰지 않기 때문에 10년 후에도 ‘지나간 디자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건 미니멀 디자인이 가진 장점이자 모리슨 가구의 큰 특징이다. 미니멀한 공간에서는 ‘너무 심심해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모리슨의 디자인은 군더더기는 없지만 따뜻한 구조감을 가져 공간의 여백을 해치지 않으면서 정돈된 분위기를 만든다.
일상의 디테일이 만든 미니멀 구조
모리슨은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금속 손잡이, 오래된 나무 의자, 특별하지 않은 플라스틱 용기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디자인의 씨앗이 된다. 그는 예술적 과장보다 “당연하게 존재하는 물건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철학은 전통적인 미니멀리즘보다 현실과 더 가까운 생활 감각을 담고 있다. 즉, 그의 미니멀리즘은 비움의 미학이 아니라 ‘사용성’에서 시작되는 미니멀리즘이다. 만져보면 편하고, 쓰면 기능이 드러나며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물건. 그게 모리슨의 디자인이 가진 힘이다. 이런 관점은 지금 ‘따뜻한 미니멀’ 트렌드와도 이어진다. 차갑지 않고, 과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은 덜어냈지만 생활의 감정은 지켜주는 디자인. 그런 물건이 요즘 더 주목받는 이유다.
오래 두고 쓰는 물건의 조건
재스퍼 모리슨은 ‘잘 만든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형태, 비례, 기능, 여백, 질감이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그 조용함이 완성된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은 미니멀리즘과 닮았다. 비우는 과정에서 본질을 드러내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오래 머무는 형태를 찾는 태도. 미니멀 인테리어가 일상을 바꾸기 시작한 지금, 재스퍼 모리슨은 “과하지 않은 디자인도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디자이너다.